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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 무라카미 하루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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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 무라카미 하루키

mind-minder 2011. 7. 11.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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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가벼운 혼란에 휩싸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에 따라다니는 고전적인 패러독스에 발목을 붙잡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정보량을 두고 말한다면 나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는 필연적으로 그 설명을 하는 나에 의해(그 가치관이나 감각의 척도, 관찰자로서의 능력, 여러 가지 현실적 이해 관계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의 모습에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이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마음에 걸렸던 문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공포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바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자기는 깨닫지 못하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변명과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교언영색에 너무나 쉽게 속아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만약 그럴 필요가 있을 경우라 해도) 보류하고 싶어진다. 그보다는 오히려 나라는 존재 이외의 존재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객관적 사실을 알고 싶다. 그리고 그런 개별적인 사항이나 인물이 나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 하는 분포, 또는 그것들을 포함한 나 자신의 균형 감각을 통하여 나라는 인간적 존재를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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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없이 책꽂이에서 책 한권을 꺼내 들고, 예전에 읽으면서 접어 표시해두었던 부분을 아무 곳이나 펼쳤다. 글자들을 무의미하게 훑다가 찔리는 부분이 있어 그대로 손을 멈춰 다시 읽어 보니, 역시 이런 감성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흡인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