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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mind-minder 2010. 6. 20. 20:38
무라카미 하루키의 두 번째 소설, 책 뒤에 덧붙인 에필로그에 작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묻어난다.
독자인 나로서는 20대에 강렬한 사랑의 추억이나 상처입은 기억이 없어선지 주인공의 아픔과 절실함이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지만 역시 하루키는 하루키인지라, 마음에 스미는 구절은 있었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이나 그 밖의 작품들과 겹쳐지는 부분들이 보이는 이 작품은 후기작들의 습작 노트, 조각 모음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가서 뭘 할 건데?"
"일을 해야죠."
쥐는 왼쪽 손톱을 다 자른 후 몇 번이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여기서는 안 되겠어?"
"안 돼요. ……맥주가 마시고 싶어요."
쥐가 말했다.
"내가 한턱 낼게."
"고마워요."
쥐는 얼음에 담가둬 차가워진 잔에 천천히 맥주를 따르더니 단숨에 절반 정도를 마셨다.
"여기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뭐냐고 왜 묻지 않죠?"
"나도 그 심정을 알 것 같으니까."
쥐는 웃고 나서 혀를 찼다.
"제이, 그러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모두가 묻지도 말하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이해해 봤자 아무런 해결도 없어요.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런 세계에 머물렀던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제이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쥐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오른손 손톱을 깎기 시작했다.
"충분히 생각했어요. 어디를 가든 결국은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도 했구요. 하지만 역시 나는 떠날래요. 마찬가지라도 좋으니까."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물론 언젠가는 돌아오겠죠. 언젠가는. 나쁜 짓 하고 도망치는 것도 아니니까."
쥐는 접시에 담긴 주름투성이 땅콩 껍질을 소리 내어 쪼갠 뒤 재떨이에 버렸다. 잘 닦인 카운터 위에 맥주의 차가운 이슬이 생기자 그는 종이 냅킨으로 닦았다.
"언제 떠날 생각인데?"
"내일, 모레, 잘 모르겠어요. 아마 2, 3일 안에 떠날 거예요. 준비는 벌써 끝났거든요."
"꽤 성급한데 그래."
"네…… 여러 가지로 폐만 끼쳤어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
제이는 선반에 놓여 있는 잔을 마른 천으로 닦으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모두 꿈만 같아."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 204 ~ 206p.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을 하며 읽게 된 부분이다. 주요 장면은 물론 핀볼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지만 왠지 쥐의 대사가 내가 뱉고 있는 말인 양 느껴져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