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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타샤 - 조지수

mind-minder 2009. 4. 27. 02:03
나스타샤 Nastasha
지은이 | 조지수
도서출판 베아르피


일요일 밤이다. 정확히는 월요일 새벽.
매주 가장 심한 불면에 시달리는 날, 게다가 오늘은 쓴 커피를 커다란 머그컵으로 한잔 마셨으니 아마도 늦은 시각까지 잠 못이루게 되겠지. 또한 오늘 읽기를 끝낸 상당한 두께의 소설 한권이 나를  동요시키기에 더욱.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은 것이고 소금이 안 들어간 음식과 같은 것이다. 있어야 할 어떤 삶이 빠져 있는 삶이고 충족감이 결여된 삶이다. 허전하고 공허한 삶이다. 나의 언어, 나의 표정, 나의 웃음, 나의 눈물 - 이러한 것들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도 없다. 이것들은 고유의 것이고 동족만이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 명의 낯선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니던 명동 거리, 친구들과 같이 시끄러웠던 목로주점, 집으로 구부러진 골목길 - 이러한 것들은 나를 이해하는 것들이고 나의 소유이고 내 영혼에 새겨진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 여기에 얽힌 사람들 사이에서 내 삶은 소외가 없고 빗겨가는 것이 없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나의 충족감을 위해 봉사해준다. 내가 지낸 세월, 내게 익숙한 것들. 내게 친근한 사람 - 내 영혼이 이것들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스며서 나의 영혼을 완성했다. 
외국은 여행할 곳이지 거처를 정하고 살 곳은 아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소크라테스는 추방보다 죽음을 택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죽음보다 더한 것을 선택했나 보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미국에서의 나의 삶은 되새기기조차 싫다. 친구도 만들지 않았다. 스스로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내면을 공유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내면이라는 것이 있기나 했을까? 캐나다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나는 좋았다고 생각한다. 자연을 즐겼고 친구들을 즐겼고 공동사회 속에서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스타샤를 만났다. 그러나 조국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 549p.

이 책의 서평에 이 구절이 인용되어 있었다.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년부터 요근래까지 줄곧 대한민국이 아닌 곳에서의 삶을 기대하고 있는 내게 이 보다 자극적인 구절이 있었을까. 책의 제목과 조지수라는 낯선 이름의 저자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단지 눈에 띄는 구절이 있다는 이유로 이 책을 선택했다.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상당한 두께의 책을 받아들고 표지를 열어 보고서야 저자가 한국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연했다. 그러고 보니 표지엔 제목과 조지수 장편소설이란 글씨 외에 역자의 이름이 없었다. 이 책이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가 토대가 되었다면 지금 아마 그는 60대의 남성일 것이다.


나는 그 나이 때에 망설였다. 모든 것에 망설였다. 무엇보다도 나의 앞날에 드리운 불안과 미확정에 망설였다. 최초로 주어진 자율은 행복과 동시에 불안이었다. 살아가는 것도 망설여졌다. 어디로 걸어야 할지 몰랐다. 나이 든 사람들의 편안함과 안정을 부러워했고 동경했다.
나를 유학으로 내몬 충동은 불안과 동요였다. 어딘가에 나 자신을 매몰시키고 싶었다. 열심히 살면 왜 사느냐를 묻지 않을 것 같았고 시간도 빨리 흐를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넓고 막막한 나라에서 시간은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한참을 살고 한참을 자고 한참을 운전해도 기껏 몇 주가 흘렀다. 나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원망했다. 나이 든 사람들의 편안함은 포기와 낙담의 대가이다. 생명의 설렘을 모두 포기한 채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지향점도 없다는 근본적 절망에서 나오는 편안함. 그러나 젊음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그들의 설렘을 건다. 부유하고 망설이고 떨고 고뇌한다. 어느 쪽이 행복일까.
- 20p.

나는 이제 늙어가는 그렉과 베시에게서 사진 속의 이날을 본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서다. 삶은 사건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한 나의 느낌과 기억일 뿐이다. 돌이키면 삶은 모두 단순하다. 삶이 풍부해지는 것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추억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어찌어찌 힘들게 젊은 시절을 빠져나온다. 열정과 불안과 동요는 거칠게 우리를 휘둘렀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행복한 젊음이란 없다. 단지 행복한 젊은이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젊은이들은 그의 삶에 많은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오래 기억되듯, 불행한 젊은 시절이 우리의 삶에 어떤 흔적을 멀리까지 남겨준다.
우리 모두는 늙어간다. 정념과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남은 삶이 회상과 추억에 의해 아름다워질 때, 젊은 시절의 방황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준다. 어떤 느낌인가를.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 방황은.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면 수많은 영혼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나는 속삭인다.
"그렇다. 우리는 힘겨웠다. 모두가 무엇인가를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했다는 것, 서로 사랑했다는 것, 그리고 그 추억으로 나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 - 이것들이 중요히다."
- 172, 173p.


나는 제대로 된 20대를 지내오지 못했다. 나의 20대는 무지에서 나온 냉소 외에 다름아니었기에.
10년이나 늦게 찾아온 성장통에 이제서야 허우적대고 있다. 고뇌없던 청춘은 지금 내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있다. 내게 있어 30대는 안정기로 접어드는 시기가 아니라 고민과 선택의 시간들이다. 인생을 좀 더 멀리 보려 하고 있고, 지금껏 이뤄오지 못한 무언가 완성된 삶이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망설이고 있는 나는 인생을 먼저 살고 젊음을 추억할 수 있게 된 이 선배의 이야기에 마음이 복잡해진다.